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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변도우 작품집] 나의 시 나의 삶

변도우 작품집

불현듯 북받쳐 오르는 벅찬 감정을 단 몇 줄의 글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. 또 어줍잖은 글재주로는 물고기 비늘 한 조각에 불과할 정도의 분량 밖에 표현할 수 없어 문득 잠에서 깨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 자신이 시의 산고 중에 있는 것만큼이나 긴장되고 흥분되기 마련이다.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늘을 향해 열정을 다하여 피고 지는 한 포기 들꽃같은 삶이 부럽고 어둠이 짙어야 비로소 드러나는 반딧불이가 더 정감이 간다.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오늘도 내 삶을 돌이켜볼 때 마냥 죄스럽다.
불현듯 북받쳐 오르는 벅찬 감정을 단 몇 줄의 글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. 또 어줍잖은 글재주로는 물고기 비늘 한 조각에 불과할 정도의 분량 밖에 표현할 수 없어 문득 잠에서 깨어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나 자신이 시의 산고 중에 있는 것만큼이나 긴장되고 흥분되기 마련이다.

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늘을 향해 열정을 다하여 피고 지는 한 포기 들꽃같은 삶이 부럽고 어둠이 짙어야 비로소 드러나는 반딧불이가 더 정감이 간다.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오늘도 내 삶을 돌이켜볼 때 마냥 죄스럽다.
안녕하십니까, 맑은 샘이 되고 싶은 정재井渽 변도우입니다.‘정재’라는 제 호는 사실 제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라 제가 잘 아는 동생과 다름없는 지인이 시인이 되어서 별호 하나 없어서 되겠느냐고 제게 마르지 않는‘맑은 샘’이 되라고 한문까지 써가면서 선물을 해서 이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. 아시다시피 제 자신이 그렇게 맑은 자가 아니어서 별칭이라고 해 놓고 보니 조금 쑥스럽기는 합니다만 그런대로 내 인생의 지향점을 잘 표현하였다 하겠습니다. 선친께서 지어 주신 제 아호가‘인창仁昌’이라 어릴 때부터 익숙해서 이것을 자연스레 처음에 사용했습니다만 오비이락이라고 할까 부산 초량에 있던 침례병원이 이사를 가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병원 이름이‘인창병원’이라 좀 그렇다 싶던 차에 지인의 권유로 잘 되었다 싶어 어진 인창에서 맑은 정재라는 이름을 선호하게 되어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다.

이 나이가 되어 제 자신을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이 제 스타일도 아니고 또 글이라는 것이 물고기로 치면 비늘 하나에 불과할까 할 정도의 분량에 겨우 드러낼까 말까하는 것임을 잘 압니다만 지금 이 순간 잠에서 깨어 자판을 두드리는 저 자신이 시의 산고 중에 있는 것만큼이나 긴장되고 흥분됩니다.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“들의 백합화를 보아라!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르시지 아니 하냐?”라고 예로 지목한,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포기 들꽃이 하늘을 향하여 온 정열을 다하여 피고 지는 그런 삶이 부럽더군요. 도심의 불빛에 자신을 발견하는 것보다 어둠에 묻혀 비로소 드러나는 반딧불이가 더 정감이 가다 보니 수명이 다해 언제 꺼질지 모르는 형광등과 같이 이리 깜박 저리 깜박 하며 살고 있나 봅니다. 괴리의 간격이 전혀 좁혀지지 않는 오늘 제 삶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습니다.

경상도가 고향이나 태어난 곳은 서울이고, 어린 시절은 강원도에서 보냈고, 학교는 인천에서 했고, 먼저 하늘나라에 가버린 두 꼬치친구 중 하나는 충청도 하나는 전라도, 그리고 태어나기는 부산이라도 본 고향은 이북 평안도인 아내와 부산에서 수십 년을 지금 살고 있다 보니‘당신 고향이 어디요?’하면 그저 쉽게 집성촌이 있고 제 일가들이 있는 부모님 고향 경상북도 봉화라고 합니다만 제 말씨로만으로는 어디 출신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. 제가 소위 이식율이 좋다고 할까요. 전라도? 예, 서울? 아 예, 경상도? 당연하지요 예 라고 쉽게 긍정합니다.

저의 집안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으로 철저한 가부장 소위 당연한 상명하복으로 어른의 한 마디는 토를 달 수 없고 무조건 해야 하는 미션의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. 그러다 보니 저도 배운 게 그것이라 지금도 아내나 자식들에게 그리고 회사 직원들에게도 하라면 하지 하는 토론과 협치가 아닌 전횡에 빠지는 우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. 부끄럽습니다만 제 아킬레스건이기도 합니다. 그러니 맑은 샘은 무슨 맑은 샘입니까? 맑은 샘이 되고 싶다면 모를까.
우리의 삶이 하나같이 관계 즉 만남에서 이어지고 매듭 되어 가듯이 그런가봅니다.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서 자라지 않았던들 그 산골까지 그림판을 가져와 전도에 열심인 청년들이 있어 그들의 얼굴은 하나도 기억에 없지만 그림 내용들은 지금도 선명히 각인되어 오늘의 나를 견인하지 않았나 싶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어쩔 수 없이 미션스쿨에 가게 된 배경, 대학교에 들어가 사귄 친구가 어쩌면 그렇게 절묘하게 주먹장이가 예수쟁이가 되는 바람에 나도 거기에 잠시 젖어 버리고, 그렇게 하나 둘 진리의 단편들이 내게 쌓여 가더니 결과적으로 실패자의 마음으로 부산에 온 것이 오히려 예수님도 만나고 아내도 만나고 인생의 대박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. 좋으신 하나님이지요,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없는 자를 들어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는 그 말씀이 나의 경우로 현실화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. 하나님 감사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.

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참으로 우연이라 하겠습니다. 누구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 가수를 보면 가수가 되고 싶고 아름다운 이를 보면 나도 그러고 싶고, 나도 의사가 되었으면, 어쩌면 저런 시인이 될 수 있을까, 그림도 잘 그리고 싶고 하여간 되고 싶은 게 많은 게 사람의 속성이 아니겠습니까. 저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저 그런 사람인데 저를 눈여겨볼 일이 전혀 없는 김종화 시인이 느닷없이 제게 다가와 우리 문학 한 번 해 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제가 그랬습니다. 출신도 문과가 아니라 이공계이고 지금도 전자 쪽 일을 하고 있을 정도로 문학의 배경이 전혀 없는 나에게 무슨 이유로 권유했는지 아직도 의문입니다만 제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일기를 틈틈이 써 왔던 것밖에 없어 마른 우물에서 무엇이 나오겠습니까만 따라가다 보니 제게 있어서는 새로운 개척지나 다름없는 문학의 신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. 망망대해, 무한의 보고와 같다고 할까요 경이! 그 자체라 할 수 있는,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블랙홀과 같이 소화하지 못할 것이 없고 칠하지 못할 색이 없고 입지 못할 옷이 없고 형이상학이든 하학이든 거칠 것이 없는 무한의 기저에 저를 빠뜨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.
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부여이긴 합니다만 저에게 있어 문학이란 곧 과거와 지금과 앞으로 있게 될 들숨과 날숨 곧 삶의 호흡이라는 극히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사실을 부인치 못하겠습니다.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시작할 걸, 후회가 되는 것이 알고 보니 등단 시인이 되기 전에 이미 삶 속에서 역설적인 의미로 이미 시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. 이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숨을 쉬고 있는 모든 사람의 삶이 곧 시인의 삶이요, 의문표와 느낌표의 표출이라는 사실을 만시지탄으로 알았다고나 할까요. 표현의 미숙과 거친 질감도 목소리가 다르듯 다를 수밖에 없는 개성이 있는 우리 모두가 시인이 아니겠습니까. 그런 의미에서 제가 시인이 된 것이 부끄럽지도 쑥스럽지도 않은 그대로로 받아들여지는, 노래하는 남은 삶으로 채워지길 바라는 소박한 꿈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.

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됩니다만 돌아보니 저에게도 삶의 확실한 변곡점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. 먼저는 어릴 적 강원도 산골에서 그림으로 본 철수의 마음이 각인된 것, 이로써 사람의 근본에 대하여 사고하는 눈을 뜨게 되었고 자라서는 아주 화목한 가정을 가진 친구를 만나 기독교 가정의 실체를 경험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근간이 되었지 않았나 싶고, 학교도 직장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실패하여 나뭇가지에 있지 못해 속절없이 낙오되어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않은 낙엽과 같아도 그것들이 곧 나를 새롭게 틔우는 자양분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, 빼놓을 수 없는 귀한 경험이 되었다는 사실 앞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.
누구나 삶의 목표가 있고 그 삶의 목표가 우리를 힘차게 견인하지 않겠습니까. 부산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니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로 살게 되어 참 좋았습니다. 직장에서의 애환도, 가장 사랑했던 아이를 먼저 보낸 아픔도, 마이너스 통장으로도 채워지지 않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의 팍팍함도 다 하나님 감사로 해석이 되어,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넉넉한 자처럼 아내도 저도 호호 하하로 살게 되더군요. 그러다 어느 날 죽은 자식 미련 떨치지 못하듯 그렇게 홀로 책상에 앉아 컴퓨터에 매달려 삶과 씨름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 날도 그러다가 문득‘아, 내가 감사만 할 줄 알았지 아무 것도 하나님께 드린 것이 없네?’하는 생각이 나자 번개 치듯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. 마치 아빠가 사 준 운동화를 신고‘아빠 고마워’하며 방긋 말만 그치지 않고 뛰쳐나가 꽃 한 송이라도 꺾어 와‘이 꽃 아빠 고마워서 따 왔어’하고 준다면 아마 아빠가 너무 좋아서 아기를 껴안고 폭포수 뽀뽀를 해 주지 않을까요? 바로 그런 생각이 난 겁니다.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데 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얼마나 뛰던지 지금도 그 생각에 흥분이 가시지 않습니다. 감사의 반응거리를 찾기 시작한 제 인생의 대 변곡점이요 대 전환의 시작, 잊지 못할 느낌표가 된 것입니다. 예수를 만난 것도 감사한 데 감사의 반응거리가 생겼다는 것,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지금도 그 당시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.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의 원천에서 갈증 난 배를 채우고 있다고 할까요. 신명나게 사는 미친 삶을 발견했다면 제가 너무 오버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.

마지막으로 시조의 틀에 갇혀 꽤 오랫동안 헤맸던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. 시인이 되고 행복하던 차에 시조에 대하여도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습니다. 한국인이니까요. 그런데 문제는 시와 시조가 같은 듯 다르며 궤를 달리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입니다. 무식하면 용감하다던가요. 시인으로 등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시조시인이 되는 기회가 와서 기회다 싶어 등단을 한 것까지는 좋았습니다.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시조라는 마약과 같은 넝쿨 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. 시를 쓸라치면 시조의 운율이 마음을 잡아 그 속에 무지막지하게 처넣는데 시쳇말로 미치겠습디다. 시조의 운율은 그 당시 제게 있어 어느새 양약이 아닌 독약이 되었습니다. 그것도 치명적인. 그래서는 안 된다 하면서도 절제된 시가 아닌 경직된 시조로 이끌어지는 통에 급기야 글이 씌어지지 않고 일기도 중단하는 나락에 빠져 시인의 삶을 접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. 시조를 잘못 적용한 뼈아픈 실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. 그러기를 무려 수 년의 세월이 무심히 지나가고 나서야 독성도 힘을 다 했는지, 이제 조금 자유스러워져 글이 슬 슬 씌어지기 시작합니다.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. 시조만큼 우리 말씨 따라 운률을 덧입은 시가 세상에 있을까요? 그 자체가 노랫가락이고 촌철살인을 맛보려면 우리나라 시조만한 것이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.

가정에서는 지아비로서 아비로서 그리고 할애비로서,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가정을 책임지는 책임자로서, 교회에서는 섬김을 다 하려는 장로로서, 호흡이 있는 시로 삶의 타래를 더불어 펴고 감아가며,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감사의 꽃 한 송이를 꺾어 드리는 신명의 삶을 살고자하는 맑은 샘이고픈 변도우의 편린을 이렇게 부끄럽게 드러내 봅니다.


2018년 끄트머리에서

정재井渽 변도우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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